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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개에서 물은 세 줄기, 길도 세 줄기 만나고 나누어진다. | ||
김동리의 소설 ‘역마’는 이렇게 시작된다.
‘화개장터’의 냇물은 길과 함께 흘러서 세 갈래로 나 있었다. 한 줄기는 전라도 구례(求禮)쪽에서 오고 한 줄기는 경상도쪽 화개협(花開峽)에서 흘러 내려, 여기서 합쳐서, 푸른 산과 검은 고목 그림자를 거꾸로 비치인 채, 호수같이 조용히 돌아, 경상 전라 양도의 경계를 그어 주며, 다시 남으로 남으로 흘러내리는 것이, 섬진강(蟾津江) 본류(本流)였다.
하동(河東), 구례, 쌍계사(雙磎寺)의 세 갈래 길목이라 오고가는 나그네로 하여, ‘화개장터’엔 장날이 아니라도 언제나 흥성거리는 날이 많았다. 지리산(智異山) 들어가는 길이 고래로 허다하지만, 쌍계사 세이암(洗耳岩)의 화개협 시오 리를 끼고 앉은 ‘화개장터’의 이름이 높았다. 경상 전라 양 도 접경이 한두 군데일 리 없지만 또한 이 ‘화개장터’를 두고 일렀다. 장날이면 지리산 화전민(火田民)들의 더덕, 도라지, 두릅, 고사리들이 화갯골에서 내려오고 전라도 황아 장수들의 실, 바늘, 면경, 가위, 허리끈, 주머니끈, 족집게 골백분 들이 또한 구렛길에서 넘어오고 하동길에서는 섬진강 하류의 해물 장수들이 김, 미역, 청각, 명태, 자반 조기, 자반 고등어들이 올라오곤 하여 산협(山峽)치고는 꽤 성한 장이 서는 것이기도 했으나, 그러나 ‘화개장터’의 이름은 장으로 하여서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장이 서지 않는 날일지라도 인근(隣近) 고을 사람들에게 그곳이 그렇게 언제나 그리운 것은, 장터 위에서 화갯골로 뻗쳐 앉은 주막마다 유달리 맑고 시원한 막걸리와 펄펄 살아뛰는 물고기의 회를 먹을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오빠, 편히 사시오.” 하고 거의 울음이 다 된 마지막 목소리를 남기고 돌아선 계연의 저만치 가고 있는 항라 적삼을,,,>
‘역마’의 내용을 누구에게 얘기해 주다가 이 대목에서는 목이 메어서 숨을 고른다. 듣는 사람은 멀뚱히 딴 생각을 하고 있다.
새로 만들어진 장터에 계연이 떠나는 장면이 그림으로 새겨져 있다. 포동 들어가는 입구의 벽화처럼 현실감도 없고 세밀하지도 않다. 동동주 도토리묵을 외치는 상인들과 ‘무조건 달려갈거야’ 같은 노래들이 섞여 흐르는, 손때 없는 새 장터에서 역마의 장면을 담은 그림들조차 울긋불긋 때때옷 같다.
소설 속에서 계연과 성기는 칠불암에 가면서 가까워진다. 화개장터에서 칠불암은 멀다. 삼십 리가 넘는다. 거리를 km로 말하지 않고 차로 걸리는 시간으로 따지는 지금도 칠불암은 멀다. 버스가 다니지 않기 때문이다.
화개에 오면 반드시 구경시켜야 할 곳으로 ‘역마’에 나오는 칠불암에 차를 얻어 타고 오르다. 김수로의 일곱 아들이 불도에 전념하여 성불한 곳이라 하여 칠불암이라 한다. 한번 불을 넣으면 겨울 내내 식지 않는다는 전해지는 亞자 형태의 온돌방도 있다. 이 ‘아자방’은 유리창 안으로 들여다보아야 한다.
외로운 구름 최치원
다시 내려 와 버스가 닿는 신흥마을에 오면 최치원을 만난다. 외로운 구름이라는 그의 호는 최 선생의 인생을 한마디로 요약한다. 노년에 가난한 것, 장년에 상처하는 것과 더불어서 고난 중의 하나로 꼽히는 소년 급제 인생은 애달프다. 그의 조국 신라는 당나라 천지에서 뽐내던 그의 학식과 문장을 받아들일 만한 그릇이 되지 못했다. 곳곳을 떠돌았던 인생이니만큼 경상도 곳곳에는 그의 흔적이 있다.
세상의 더러움에 물든 귀를 씻었다는 세이암. 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제가야산독서당’이라는 시를 떠올리게 한다. 최 선생의 지팡이가 자라났다는 나무는 초등학교 분교 입구를 하늘 높이 장식하고 있다.
화개동천 花開洞天
화개동천이라고 했다. 산수가 멋지게 어우러진 곳에 ‘동천’이라는 표현을 붙였다. 꽃이 핀다는 ‘화개’를 앞에 붙이면 복숭아꽃 천지로 핀 무릉도원처럼 들린다. 쓰레기, 간판, 강변에 가득 찬 평상, 비닐로 둘러친 간이식당들이 널려도 수려한 바위들을 쓰다듬으며 흐르는 물들의 기품을 못 가린다. 계곡이 깊어서 피아골 수량은 비교할 바가 아니라고 산장주인 임용택은 말한다.
쌍계사에는 최치원이 직접 짓고 새긴 글이 비석으로 남아있다. 동방세계의 중심 당나라 장안에서 활동한 한반도 초기 글로벌 인재 최치원이 고국에서 겪는 고독이 천 년을 넘어서 안쓰럽게 전해온다.
화개로 내려오는 길은 벚꽃이 터널을 이루고 있다. 남자도 기혼녀도 신부가 된 듯 화사하다. 도종환 시인은 만개한 화개 벚꽃을 일러서 꽃이 ‘출렁거렸다’는 표현을 썼다. 끝없이 줄을 서 있는 차들도 꽃잎들 아래에서는 성가셔 보이지 않는다.
버스 정류장의 할머니는 휴대전화에 대고서 누군가에게 말한다. “꽃이 피어서 차가 안온다.” 하동 병원에 가려고 나섰다는데 붉고 푸른 관광차들 사이로 승용차와 짚차들이 도로를 가득 메워서 버스가 제 시간에 닿지 않는다.
꽃이 출렁거렸다.
그러기에 꽃 피는 철에 화개에 가려면 차들이 꼬리를 물고 화개를 빠져나가는 오후에 들어가서 벚꽃 터널을 밤늦도록 거닐다가 다음날 오전 햇살과 함께 다시 밀려드는 관광객들을 스치며 화개를 빠져나오면 좋다.
화개 막걸리는 지금 이왕근 사장이 운영하는 화개합동양조장에서 명맥을 유지한다. ‘역마’에서 칭찬한 만큼, 텁텁함이 없고 맑게 넘어간다. 20리터쯤 되려나, 플라스틱 통들이 줄지어 있다. 막걸리 열풍이 몰아쳐서 힘들게 되었다고 한다. 막걸리 인기가 높아지면서 대기업들이 막걸리 생산에 뛰어 드니 도리어 지역의 작은 양조장들이 힘들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사위 둘을 화개양조장에 술 받아오라고 보냈더니 한참 만에 취해서 돌아왔다고 한다. 덤으로 주지는 못하지만 마실 만큼은 먹고 가라는 주인의 선심 덕분이었다. 술 한 말을 지고는 못 가도 먹고는 간다고 했다. 포동에 가끔 오는 땅콩 장사도 좀 더 싸주지는 못해도 먹고는 가라고 한다.
길도 세 줄기, 물도 세 줄기. 구례 연곡이 바로 너머인데 경상과 전라로 나누어 졌다. 다른 곳의 지방 경계에 비해 이동이 쉬웠기 때문에 물산이 모여들고 사람이 모여들었으리라 추산한다.
멀지 않은 마을인데 사투리가 다르고, 음식이 다르다. 강 너머 전라도에서 화개로 시집왔다는 할머니의 말씀이 원색적이다. “내가 처음 여기로 시집와보니 개밥을 먹고 있더라.” 지리산에 등을 대고 앉은 마을들은 지방이나 도의 구분 없이 그냥 지리산 마을들이다. 전라도에서 온 사람이 경상도 욕을 해도 지리산 안에서는 넉넉한 해학이다.
조영남 장터
‘구경 한번 와 보세요―’ 조영남의 호객에 힘입어 사람들이 몰려들고 급기야 좁은 5일장 대신 개울 건너 공터에 큰 장터를 새로 꾸몄다. 노래를 낳은 장터는 없어지고 노래가 낳은 장터가 요란하다. 장터 한 가운데에는 노래비를 세워서 조영남과 그의 노래를 기념하고 있다. 화개에서 쌍계사까지는 관광지 느낌이 강하고 쌍계사를 지나 더 올라가면 지리산 아랫마을답게 산바람이 서늘하다.
광명역 출발. 익산에서 기차를 갈아타고 구례구역, 구례 버스정류장에서 화개 가는 버스를 탔다.
<글·사진=주영경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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