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근 부천원예조합장
전 시흥시의회 의장
변화에 대한 기대가 크지만 좀처럼 쉽게 변해주지 않는 곳 중 하나가 학교다. 체벌과 왕따, 입시를 위한 주입식 교육, 과도한 경쟁체제. 이러한 문제는 부모 세대가 이미 겪은 폐해지만 신기하게도 그 자녀들에게 그대로 적용된다. 아니, 그대로라고 하면 요즘 학생들이 심히 섭섭할 정도로 이런 문제들은 정도가 훨씬 심각해지고 있는 것 같다.
얼핏 생각하면 내가 고통스럽게 통과한 과정이니 내 자녀만은 겪지 않게 하리라는 결심에 의해 쉽게 변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지가 않다. 오히려 내 자식만은 그 무한경쟁에서 당당히 ‘승리’하길 바라는 마음이 크기 때문일까, 아니면 강력하고 복잡하게 얽혀 있는 사회의 구조적 문제 때문일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런 교육계 현실에 대해 학생들은 물론 학부모, 교직원들도 갑갑증과 조바심,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리라. 그렇기에 지난 6·2 지방선거에서 주민직선 초대 교육감을 선출하면서 교육계에 변화의 바람이 불길 내심 기대한 것도 사실이다. 그리 쉽게 바뀔 수 없다는 생각의 한편엔 이번만은 뭔가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한줌의 희망이 싹트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며칠 전 강원도 교육청이 일선 학교와 학원에 보냈다는 공문은 ‘상큼’했다. 학교 간 위계서열화와 지나친 경쟁을 조장하는 각종 현수막에 대해 자율적으로 규제해 줄 것을 요청한 것이다. 즉, 학교나 학원 앞에 ‘S대 O명 합격, 경축-O회 졸업생 사법고시 합격’ 등의 현수막을 내걸지 말아 달라는 게 강원도 교육청의 요청이다.
강원도 교육청은 각종 현수막이 입시경쟁사회, 학벌사회, 출세지향주의 등을 조장해 많은 학생들에게 소외감과 상처를 주는 등 비교육적 측면이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고 한다.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 최선을 다한 점에 대해선 축하해야 하지만 출세한 소수만을 위한 현수막은 대다수 사람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혹자는 웬, 말도 안 되는 공문이냐며 발끈할 만도 하다. 너도 나도 오직 더 높은 자리, 부와 명예가 보장되는 자리에 오르기 위해 발버둥 치는 세상에서 교육청이 나서서 이런 ‘권고’를 했으니 말이다.
더 다그치고, 더 경쟁심을 자극해 한 명이라도 더 좋은 대학에 보낼 생각은 안하고 뭐하자는 건가 비난했을 수도 있다. 또 ‘잘난 자식’ 둔 부모 입장에서는 섭섭하기까지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강원도 교육청의 공문은 지극히 ‘교육적’이다.
사실, 명문대에 진학하고, 바늘구멍 뚫기라는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무슨 무슨 대회에서 큰 상을 수여하는 학생들 비율은 전체 학생을 놓고 보면 얼마나 적은가. 본인의 노력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소임에는 틀림없지만 부모의 경제력과 정보력이 석차를 좌지우지한다는 점은 이미 어린 학생들도 알고 있는 공공연한 사실 아닌가.
상위 1%가 있으면 나머지 99%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우린 그동안 너무 뻔뻔하고 자연스럽게 그 많은 학생들에게 오직 좋은 대학 진학과 출세를 제 1의 미덕으로 추켜세웠으니 삶의 목표를 잃고 방황하는 청춘들이 많아질 수밖에. 출발점이 다르고 조건이 다르다는 점도 고려하지 않은 채 너무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루저’로 느끼도록 강요하는 사회를 만들지 않았는가.
작은 공문하나가 이토록 신선한 것은 아마도 이런 점 때문이리라. 열심히 공부하는 건 누가 뭐래도 참 좋은 일이다. 초롱초롱 빛나는 눈으로 책을 보는 어린 학생들의 모습은 얼마나 대견한가. 나이를 잊은 채 도서관 한쪽을 차지하고 책에 빠져 있는 만학도의 모습은 또 얼마나 존경스러운가. 무언가에 열심히 몰두해 있는 모습은 그 자체로 아름답지만 오직 나의 안락을 보장받고 더 많은 부를 축적하기 위한 공부와 출세라면 현수막까지 만들어 ‘경축’할 일은 아니다.
우리 교육의 목적은 명문대 나온 정치인, 단번에 사법시험에 합격한 머리 좋은 검사가 아니라 청렴하고 소신 있고 능력 있는 정치인과 검사를 배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인, 검사만이 아니라 건강하게 노동하는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다 소중하다는 인식을 갖게 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지만 우리 시흥시도 교육에 쏟는 관심이 남다르다. 지극히 바람직한 일이지만 그 관심이 ‘경쟁에서의 승리’로만 흐르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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