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근 회장
시흥예술문화소비연대
중국의 전한(前漢) 말기, 절세미인 궁녀 왕소군이 흉노의 왕에게 시집갔다. 흉노를 달래기 위한 화친 혼인이었다. 훗날 당나라 시인 동방규가 모래로 뒤덮인 오랑캐 땅에서 삭막한 삶을 살았을 그를 노래했다. ‘호지무화초(胡地無花草)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즉 ‘모래 땅에 화초와 풀이 없을 테니 봄이 와도 봄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라고 안타까워 한 것이다.
마흔여섯에 노래를 시작해 소리꾼으로 성공한 장사익은 ‘찔레꽃’으로 아련한 시절을 찌르고, ‘꽃구경’ 가자고 절창한다. 꽃 시리즈 중에서도 그의 ‘봄날은 간다’를 듣고 있노라면 그리움과 애절함이 더해 가는건 나이 때문일까.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왕소군의 ‘춘래불사춘’이나 장사익의 ‘봄날은 간다’ 모두 절절한 봄이지만 2010년 봄은 그 어느해보다 가장 슬픈 봄이다.
올봄은 3월26일 밤 칠흑같은 백령도 앞바다에서 시작됐다. 정치꾼이나 언론은 온갖 추측과 소문을 만들어내며 호들갑을 떨었지만 정작 모든 것을 지켜본 바다는 여전히 침묵이다. 한 달이 됐지만 여전히 차갑고 어두운 바닷속에서 ‘귀환’하지 못한 장병들을 생각하면 길가를 시리게 수놓은 벚꽃마저 잔인하게 느껴진다. 반드시 왔어야 될 우리의 아들, 동생, 후배는 차가운 주검으로 오고, 일부는 아직 오지도 못하고 있는데, 기어코 하얀 꽃망울을 터뜨리며 어느새 지천으로 와있으니 말이다.
T.S 엘리엇이 <황무지>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 하고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고 읊조린 것이 대한민국의 올 봄 4월을 두고 말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점령군처럼 어느날 갑자기 길과 산과 들녘에 포진한 저 화사함. 돌이켜보면 그 자체로 조용히 감상하며 봄날을 맞이했던 적이 언제였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거슬러, 아주 많이 거슬러 올라 세상의 끝이 동네 어귀 어디쯤이라 생각했던 시절엔 개구리 잡고 진달래 꽃잎 따먹으며 온 몸으로 봄을 맞이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때 역시 감상이 아닌 기지개 켜는 계절이었다. 먹고 살기 힘든 시절의 보릿고개를 간신히 견디고 한 해 농사를 준비하는 바쁜 시기일 뿐이었으니. 따지고보면 어느 한해도 소생의 찬란한 봄을 온전히 느끼며 감상해 본 적은 없었던 모양이다.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 기념해야 할 날도 많고 행사도 연중 가장 많은 달이다. 게다가 6월2일 지방선거일을 앞두고 동네방네 선거운동으로 시끌벅적댈 것이다. 한꺼번에 8번이나 투표할 정도니 뽑아달라고 호소하는 후보자는 또 얼마나 많을까.
얼굴 한번 본 적 없어도 많은 시민들이 애끊는 심정으로 눈물 흘렸던 천안함 장병들과 금양호 선원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데 역시 많은 시민들이 피하고 싶어 하는 선거 후보자들.
왜일까. 장병도 나라를 위해 있고, 후보자들도 우리 동네, 나아가 우리나라를 위해 열심히 뛰겠다고 목청껏 외치는데…. 차이는 분명하다. 허나 단정적으로 말하진 말자. 그들을 선택하는 몫은 바로 유권자이기 때문에.
지역과 시민을 위해 온 몸을 다 바쳐 일하겠다고 맹세하는 후보자를 보며 나도 모르게 웅얼거린다.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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