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들의 기도 가운데 식사를 몇 끼씩 굶으면서 드리는 ‘금식기도’가 가장 경건한 기도로 꼽힌다. 인간의 욕망 중 가장 근본적인 욕망인 식욕까지를 절제하는 것으로 자아, 곧 ‘육신’을 부정하면서 오로지 절대자에게 일체를 의존하는 형식의 기도가 금식기도다.
우리의 전통 세시풍속 가운데에는 이같은 금식기도와는 정반대로 하루 종일 아홉 끼를 그것도 갖가지 특별식으로 배 터지게 포식하고, 거기에다 잣, 땅콩, 밤, 호두 등 군것질을 곁들이고 귀밝이술이라는 이름의 찬 술 몇 잔까지를 걸친 다음 비로소 풍요와 건강을 비는 ‘특별기도의 날’이 있다. 정월대보름이 바로 그런 날이다. 정월대보름은 1박2일 동안 먹는 걸로 시작해서 먹는 걸로 끝나는 날이다.
우리의 전통 세시는 설, 대보름, 머슴날, 영등제, 삼월삼짇날, 한식, 초파일, 단오, 유두, 삼복, 칠석, 백중, 추석, 중구, 상달고사, 손돌풍, 동지, 제석 등 18개에 이른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이 먹는 날이 대보름날이다.
설 지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데 또 무슨 명절이며 요즘 세상에 정월대보름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할 수 있겠지만, 음력 정월 보름인 대보름은 우리 민족에게 설만큼이나 중요한 날이었다. 농사꾼들에게 이날은 기니긴 겨울 농한기가 끝나고 이제부터 새해의 농사를 위해 농기구를 손보고 씨앗을 고르면서 농사 준비를 시작해야 하는, 휴식의 마지막 날이자 한 해의 농사 일이 실질적으로 시작되는 ‘시작의 날’이기 때문이다.
대보름날 연줄을 끊어 날려 보내는 것도 겨울 내내 놀았던 ‘놀기와의 이별식’이었다. 대보름의 ‘포식 퍼포먼스’는 오곡밥으로부터 시작된다. 오곡밥은 찰진 곡식 다섯 가지, 예컨대 찹쌀, 차조, 수수, 콩, 팥을 쪄낸 밥으로, 평소에는 맛보지 못한 대보름날만의 별식이다. 이제 한 해를 시작하는 마당에 찰지고 영양가 높은 음식으로 든든히 먹어두어야 건강하게 일도 잘하고 돈도 잘 벌 것이 아닌가. 잡곡밥이 우리 몸에 얼마나 좋은 지는 이미 웰빙 식단을 통해 입증되었다. 소화 잘되고 영양이 좋으며 면역력을 길러줘 무병장수에도 도움이 된다.
오곡밥은 진채식(陣菜食)으로 먹어야 금상첨화다. 진채식이란 묵은 나물을 뜻한다. 그래서 대보름날만은 김치나 날야채를 먹지 않고 반드시 지난 가을에 말려서 보관해 둔 나물을 들기름이나 참기름에 볶고 무쳐서 오곡밥과 함께 먹는다. 호박 , 토란대, 취, 시래기, 가지, 아주까리, 버섯, 고사리, 도라지. 고비. 고구마순 등 말린 나물들은 이제 봄이 되어 새로 돋을 풋나물들에게 밥상에서 자리를 내어주어야 하기 때문에 이날 많이 먹어주어야 한다.
지금은 한겨울에도 싱싱한 야채를 먹을 수 있지만 옛날 대보름에는 아직 봄나물이 나오지 않아 에너지 보충을 위해서는 진채식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대보름 전날 지어먹는 오곡밥은 반드시 장수를 빌며 먹어야 하고, 대보름 당일에도 계속 먹는다. 오곡밥은 하루에 아홉 번 먹되 아홉 가지 나물과 함께 먹어야 한 해 재수가 좋다는 속설이 전해진다.
대보름 아침에는 눈을 뜨자마자 잣, 땅콩, 밤, 호두 등을 깨무는 풍속이 있는데 이를 부럼이라고 한다. 부럼의 효능은 현대의학으로고 입증이
되고 있다. 깨물고 씹는 과정을 통해 치아에 힘을 줌으로써 뇌에 전기작용을 일으켜 기억력이 좋아지고 신장기능 향상에도 도움이 된다고 한다. 또한
겨울철에 위축되어 있던 신체 리듬을 깨워주는 역할도 해준다는 것이다.
어떻든 대보름 풍습 가운데 간과해서는 안 될 대목은, 내가 지은
오곡밥을 각기 다른 성을 가진 이웃 세 집과 나눠먹어야 운수대통한다는 속설이다. 이웃에게 나눠주는 것도 결국 내 복을 불리는 방법인
셈이다.
이제 대보름도 지나고 긴 겨울방학이 끝나 새 학기가 시작됐다. 새로운 한 해의 시작이 싱그럽게 열리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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