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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 서부신문
  • 승인 2011.07.20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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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곡고는 숲속마을에 있습니다. 참 정감있고 아름답지요. 제가 살고 있는 복잡하고 거대한 신도시의 느낌과는 많이 다릅니다. 시골에 가면 마을들이 군데군데 흩어져 있는 것과 많이 닮아 있습니다. 고향과 함께 잃어버린 사람 냄새가 날 것 같구요. 그렇게 낯설지만 정답게 장곡고와 첫인사한 지 이제 넉 달이 좀 넘어갑니다.

돌이켜 헤아려 보니 제가 아이들을 가르친 지도 20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세상을 모두 알고 있고, 마음먹은 것은 무엇이든 나의 능력과 노력으로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한 해, 한 해 나이를 먹어갈수록 내가 생각한 세상이 얼마나 좁은 세상이었는지, 삶이란 것이 얼마나 많은 우연의 연속으로 이루어지는지, 내 능력과 노력으로 이루었다고 생각하던 것들이 사실은 수많은 누군가의 땀과 눈물 위에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들을 깨달아 가는 과정이었습니다.

장곡고에서 보낸 한 학기는 그런 사실들을 다시금 확인하는 시간들이었습니다. 즐거운 순간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아이들을 통해 매 순간 제 한계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던 쓰라린 순간들도 많았습니다. 그 많은 아이들 가운데 준호(가명)와 기훈이(가명)가 있습니다.

우리 학교에서는 문학 시간에 상,중,하 그리고 플러스반으로 나누어 수준별 수업을 하고 있습니다. 많은 선생님들이 애를 쓰고 계시지만 플러스반에는 학습에 흥미를 갖지 못하는 아이들이 대부분입니다.

그 가운데 수업 시간에 특히 열심히 도만 닦는 곱슬머리 준호(가명)가 있습니다. 이 녀석은 제가 눈앞에 지키고 서서 같이 해보자 해도 조용히 앞만 보며 버티기로 일관합니다. 그 눈빛에 추호의 흔들림도 없고 고요한 것이 인적 없는 산사에서 도 닦는 스님 저리가라입니다. 나중에 얘기 들어보니 자기는 대학 안 갈 거고 졸업하면 당구장 차릴 거랍니다. 지금 현재도 알바 전선에서 하루 6만원은 번답니다.

그러던 준호가 수업 시간 내내 한눈 한 번 안 팔고 집중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나’를 표현하는 수업이었는데요. 1학기 수업을 정리하며 자기를 표현하는 글을 쓰고 꾸미라고 색종이와 스티커를 몇 장 나눠줬습니다. 그랬더니 준호가 색깔도 아주 예쁘게 맞춰가며 학도 접고 하트도 접어 미리 만들어 둔 액자 위에 근사하게 장식도 하더라구요. 그렇게 만든 액자 안에 그 아이가 쓴 내용은 ‘꿈을 위해, 생각하다’ 였습니다.

그리고 또 한 녀석-준호와 같은 반의 덩치 산보다 좀 작은-기훈이(가명)는 떠드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주로 자지요. 때와 장소, 남의 이목 등은 완전 무안중인 녀석인데요. 제가 옆으로 지나가는데 이럽니다. “태어나서 이렇게 열심히 해 본 건 처음이네.” 자기가 생각해도 신기했나 봅니다.

액자를 큰 액자, 작은 액자, 중간 액자 크기 별로 다섯 개나 접었습니다. 큰 액자 주변에 작은 액자, 중간 액자로 장식하고, 가운데 커다란 액자에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앙증맞은 빨강, 파랑 하트 스티커까지 붙여주고는 이렇게 썼습니다. ‘지금 이거 하고 있다.’ 그걸 보고 저는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뭔가 이루어내고 있다’

‘지금 이거’ 하면서 ‘꿈을 위해 생각하는’ 녀석들을 보며 저는 또 뼈아픈 반성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수업 시간 내내 떠들고 자고 멍~하게 있어서 저를 힘들게 한다고 생각했던 이 아이들이야말로 원천적으로 몰입이 불가능한 획일화된 수업과 평가 체계의 희생자들입니다. 개성 강하고 생기발랄하고 생명력 넘치는 아이들을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속으로 몰아넣어 팔다리를 잘라버리려고 한 저야말로 아이들을 고통스럽게 만든 장본인이었습니다.

입시라는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 묵묵히 자신의 짐을 지고 가는 아이들을 보면 늘 안타깝고 안쓰러움이 앞섭니다. 그렇지만 아이들은 시련 속에서도 성장을 멈추지 않습니다.

자신만의 발랄한 개성을 뽐내며 아름답게 성숙해 갑니다. 아이들은 저를 자꾸 부끄럽게 만들고 반성하게 만들고 성장하게 해 줍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아이들에게서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펼쳐 나가며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해주는 아름다운 대한민국의 꿈을 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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