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영적인 감성으로 사는 사람[월요단상] 김윤환 목사(시인)
  • shnews
  • 승인 2019.11.08 16:48
  • 댓글 0

오늘은 가을이 다 가기 전에 시와 인생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미국의 시인 리차드 에버하트(Richard Eberhart, 1904~2005)는 “인간은 조화와 사랑을 지향하는 존재”로 노래했다. 그러나 인간은 그러한 ‘사랑과 조화’속에서도 늘 고독하다. 인간이 사랑과 조화를 지향하는 것은 ‘대립성 속의 조화’를 갈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형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듯 하지만 그 안에서 조차 고독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먼저 김창희 시인의 시 「쭉정이 같은 날들」을 감상해보자.
“혼몽 속에서도 촘촘한 문살 같았던 / 젊은 날의 화면들이 사그라들 땐 / 사막의 오아시스조차 위로가 될 수 없었던 / 비릿한 날들 / 밀려가거나 밀려오는 그래서 / 유전처럼 떠돌던 바람난 바람 같은 날들이 / 생의 모퉁이를 돌며 / 또 다른 흔적들을 만들며 무덤을 이룰 땐 / 아직 로그아웃 시키지 못한 / 이번 생은 파토다“
이 시는 인간은 타인과의 관계보다 자신과 자신의 지향점 사이에 내재하는 쉽게 결합되지 않는 내면의 또 다른 자신과의 결합을 꿈꾸며 스스로에게 그물을 던지는 존재가 바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 시속의 화자는 인생을 한 바퀴 돌고 현기증 가운데 선 듯 아득한 생애의 하오를 응시하는 자신을 드려다 본다. 시인이 옮겨놓은 인생은 너울성 파도에 올려진 작은 배이거나 사막의 여행길에 아득한 오아시스를 기다리는 연약한 풍경이다. ‘사막의 오아시스조차 위로가 될 수 없고’  생의 한 모퉁이에서 자신의 흔적이 자신의 무덤이 되어가는 마치 파토(破土)된 시간에도 여전히 ‘로그아웃’ 되지 않는 살아있음의 두려움과 회한의 시편이다. 그러나 자기 고독을 대한 망각하는 것처럼 불행한 인생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인생이 ‘쭉정이 같은 날들’일지라도 비릿한 외로움을 노래함으로 오히려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간절함으로 전해져 오는 시다.
또 다른 시 한편을 소개한다. 유안진 시인의 ‘가시에게 바치다’를 함께 감상해보자.
“엉겅퀴를 쓰다듬다가 / 찔레도 며느리밑씻개풀도 쓰다듬는다 / 찔리는 맛이 좋아서 / 이러다가 엄나무 아카시아 철조망도 쓰다듬을까 / 세상 무정이 베풀어주는 무관심의 은혜에 감사하다가도 / 무소속으로 누려온 자유가 때로는 역겨워서 / 자해하고 싶었다고 / 피범벅 두 손이 고백 한다 / 장미에게 바치고 싶었다고 / 아직도 내 피가 붉은지 확인하고 싶었다고 / 단 한 번이라도 순수와 황홀에 봉사와 헌신의 의무를 / 스스로 무겁게 짐 져 보고 싶었다고”
독일의 철학자 게오르크 헤겔(Hegel, Georg Wilhelm Friedrich, 1770~1831) 은 ‘의식은 최후로 자기희생과 자기 부정이라는 수단을 취한다’고 말했다. 자기부정은 자기 드러냄의 금욕, 오히려 자기를 무(無)의 상태로 돌이키고 싶으며, 삶의 소산을 형이상학적 존재에게 희사하고 봉사하며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금욕을 지향하면 할수록 인간은 점점 더 욕구에 사로잡힌다. 시에서 자기 부정적 기능은 공허한 것이 아니라 진지한 시적 대상으로서 중요한 과제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무정, 무관심, 무소속의 자유를 누리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또 다른 욕구이다. 그러나 이성적일수록 자유가 고립으로 인식되고, 자신에게 고독과 실패의 피가 흐르는 것을 견딜 수 없다. 누군가의 짐이 되기보다 짐을 대신 져 주는, 그 짐이 결국 가시가 되더라도 그렇게 누군가를 위해 피 흘리며 살고 싶기 때문이다. 시의 화자는 ‘엉겅퀴의 가시를 쓰다듬다가’ 점차 철조망도 쓰다듬고 싶을 만큼 찔리는 맛을 누리고 싶어 한다. 자유가 역겨워 자해하고 싶은 자신을 피범벅 두 손으로 고백한다. 이렇듯 자기 부정의 고백은 놀랍게도 자기희생의 의무로 까지 승화한다. 그것은 의식의 너머 더욱 견고한 허무가 자신을 덮고 있기 때문이리라. 누구라도 허무를 엉겅퀴보다 살갑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리라. 내 곁에 가시가 없으면 내 붉은 피를 어찌 보랴.
한 시절이 다 지나는 듯한 이 가을 날 저녁 음악과 시를 읽으며 자신 안에 웅크린 또 다른 자신을 인정하는 일, 나아가 제 영혼을 부축하며 일어서는 일, 이것이 동물적 육감이 아닌 영적인 감성으로 사는 사람의 가을 산책이 아닐까. 

shnews  j5900@chol.com

<저작권자 © 시흥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shnews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