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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립 커피월요단상/현여 (법륭사 주지)
  • shnews
  • 승인 2017.11.12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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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승려생활의 사치를 말한다면 입맛에 맞는 커피를 내려서 마시는 일을 들 수 있다. 드립추출 방법은 일본에서 시작되었다. 커피원두를 분쇄기에 갈아서 드립퍼에 커피를 올려놓고 뜨거운 물을 여러 번 부어서 추출한다.

선원(禪院)에서 참선하는 한 스님이 해제 철, 법륭사에서 쉬고 간 일이 있다. 불교에서는 여름철 하안거 음력4월 15부터 7월 15까지, 동안거 음력10월 15일부터 1월15일까지 일 년에 두 차례 집중적인 선(禪) 수행을 한다. 선(禪) 수행이 끝나면 해제라고 하여 전국 방방 곳곳 사찰을 찾아다니면서 구도수행을 한다.

어느 해 선원(禪院)스님이 법륭사에 머물면서 드립 커피 도구를 구입해 놓았다. 드립 커피 도구는 분쇄기, 드립퍼, 드립포트, 여과지, 드립주전자, 등이다. 법륭사에서 스님이 원두를 천천히 분쇄기에 갈아서 뜨거운 물을 원두에 부으면 커피향이 진하게 퍼져 나갔다. 그 커피향 속에서 잘 추출된 커피를 한 잔 마시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시간이 좋았다.

스님은 다시 결제일(선원에 들어가는 날짜)되어 선원(禪院)에 들어가면서 사용하던 드립 커피도구를 주고 갔다. 드립 커피 도구가 있으니 원두를 사서 나름대로 커피를 추출해 먹으니 맛이 좋았다.

나는 연한 커피를 좋아 한다. 연한커피를 만들려면 커피콩 중에서도 쓴맛이 덜한 것을 사야한다. 그리고 커피를 추출한 후에 물과 섞어서 먹으면 된다. 커피 드립 하는 것을 따로 배우지는 않았지만 분쇄기에 원두를 넣고 손으로 돌리는 것부터 시작해 여과지를 접어서 드립퍼 위에 올려놓고 분쇄한 커피를 넣고 순서대로 추출을 하다보면 아무런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 오랜 침묵과 손동작 그리고 커피향만 살아 있다.

90년 초 서울 성북구 안암동에 있는 개운사에서 지낸 적이 있다. 개운사 앞에는 고려대학교가 있어 음식점과 술집이 넘쳐 났다. 늘 조용한 산사(山寺) 사찰에서 생활해 왔기 때문에 도시 생활은 많이 힘들었다.

그 많은 음식점과 술집 가운데 보헤미안이라는 커피숍이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유명 커피프랜차이즈나 전문 커피점이 매우 드물던 시절이었다. 보헤미안은 상가건물지하에 있었다. 클래식음악이 흐르고 땅위의 세계와 다른 고요와 편안함이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커피 전문점은 우리나라 드립 커피 1세대 박이추 선생이 직접 커피를 내리는 곳이었다. 가끔씩 ‘보헤미안’에 들러 커피도 마시고 박이추 선생과 세상 이야기도하며 지냈다. 젊은 시절 드립 커피를 접해 본 것이다.

2년 전 강릉 연곡면을 지나 갈 때 박이추 선생이 강릉으로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보헤미안’을 검색해 보니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소나무 언덕을 올라 얼마쯤 가니 2층으로 된 아담한 카페가 나왔다. 보헤미안이었다.

스무 살 초반 고려대 앞에서 커피를 마신 적이 엊그제 같은데 26년이 넘는 세월이 훌쩍 흘러 가버렸다. ‘보헤미안’ 2층에 올라가니 바리스타 박이추 선생이 커피를 볶고 있었다. 창가 언덕 너머로 멀리 동해 바다가 보였다. 동행한 지인에게 박이추 선생에게 메모를 전달해 달라고 부탁했다.

메모에는 이렇게 적었다. ‘고려대 앞 보헤미안에서 선생님의 커피를 마셨던 사람입니다. 잠깐 뵙고 싶습니다.’

커피를 볶던 박이추 선생이 작업실 밖으로 나왔다. 뿔테안경에 늘 신중한 그의 인상, 많은 말은 하지 않아도 충만한 느낌이 들었다.

26년 전 박이추 선생이 아무 말 없이 드립을 해서 내게 커피를 내어 주었다. 드립 도중에 몇 가지 질문을 했는데도 답변하지 않았다. 커피를 내게 주면서 드립 도중에 말을 하면 커피에 침이 튄다고 했다. 한 평생 커피에 일생을 바친 장인의 말이다.

어떤 드립 커피가 맛있느냐고 물으니 선생은 보헤미안 브랜딩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보헤미안 브랜딩 박이추 선생이 여러 종류의 커피콩을 섞어서 추출하는 커피이다. 26년이 넘는 세월 고개를 넘어 박이추 선생의 드립 커피를 마셨다.

형언할 수 없는 쓴 커피 맛. 그 안에 내가 지나 온 삶의 맛이 오롯이 흐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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