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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버스월요단상/현 여 (법륭사 주지)
  • shnews
  • 승인 2017.07.30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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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륭사가 이곳 샛말(시흥시 하중동)에 창건 했을 때 절 앞을 지나는 39번 국도는 비포장 도로였다. 빨간색, 파란색 줄무니가 섞여 있는 낡은 버스가 부천 남부역을 출발해 반월공단까지 운행했었다. 그 시절에는 소래읍 신천리에서 수인산업도로를 이용해 안산으로 가는 길과 절 앞 39번 비포장 길을 달려서 가는 길 외에는 따로 없었기 때문에 반월공단행 버스가 늘 만원(滿員)이었다.

버스 앞쪽 큰 엔진룸이 있고 출입문도 하나 밖에 없었다. 안내양은 버스표도 받고 지폐를 내면 거스름돈을 주기도 했다. 자동차가 귀하던 시절이라 이 버스는 흙먼지를 일으키며 이 길의 왕처럼 대접을 받으며 다녔다.

우리 마을(시흥시 하중동) 앞에는 큰 은행나무가 있었다. 버스 정류장 안내판도 없는 이곳에 버스는 항상 정차했다. 은행나무 아래로 소리사(전파사)도 있었다. 아침이면 라디오 뉴스를 크게 틀어 놓아 버스를 기다리며 세상의 크고 작은 소식들도 알 수 있었다.

이 버스는 세상과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 같았다. 이른 아침이면 군자중, 군자고등학교로 등교하는 학생들이 교복을 입은 채 버스를 기다렸다. 군자면에 5일 장이 열리면 동네 아주머니, 할머니들은 시장에 팔 물건을 큰 광주리에 넣어 머리에 이고 버스에 올랐다.

우리 마을(시흥시 하중동)은 시흥군 수암면 관할 구역이었는데 거의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의 생활권은 소래읍이나 군자면이었다. 그런 까닭 때문이었을까. 1989년 시흥시 개청 때 까지만 해도 수암면 사무소지역은 시흥시 관할이었는데 어느 날 보니 안산시로 편입되었다. 역사가 깊은 수암면사무소 건물도 철거 되었다고 들었다. 수암면사무소는 내가 첫 주민등록증을 발급 받은 곳이기도 한데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다.

서울을 가려면 버스를 타고 부천 남부역 경원여객 종점에 내려서 1호선 전철로 갈아타서 다녔다. 그 당시 1호선, 인천 의정부를 오가는 전철은 많은 사람들로 지옥철이라 불렸다. 서울에서 전철을 타고 지쳐 절로 돌아오는 길에 부천 남부역 경원여객 종점에서 버스표를 구입해 버스에 앉아 있으면 고향에 온 것 같은 편안함을 느꼈다.

버스가 출발 할 때까지 짧은 시간을 이용해 잡화를 파는 상인들도 올라와서 큰 목소리로 상품의 기능을 설명하며 팔았다. 때가 잘 밀어지는 이태리 타올도 팔고, 이불장과 옷장에 넣는 특별한 좀약도 팔고, 몇 개씩 묶어 파는 넥타이, 무좀약등 상품종류도 다양했다. 자기가 파는 상품과 덤으로 주는 것 까지 열정적으로 설명을 했다. 늘 만나는 사람에게는 눈인사도 하고 버스 출발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상인들의 이야기를 음악 소리처럼 편안하게 앉아서 들었다. 예전에는 버스 고장도 잦았다. 절 앞에서 버스가 고장 나면 길 한쪽에 세워 놓고 운전기사와 안내양은 절에 들어와서 점심도 먹고 부처님도 보면서 버스수리 기사를 기다렸다. 이렇게 인연이 되어 절에서는 명절이 되면 경원여객 부천 사무소에 떡도 보내고 가깝게 지냈다. 시골에서 떠나온 안내양들은 쉬는 날이면 법륭사를 찾아와 놀다가기도 했었다.

세월은 흘러 버스에 문이 두 개 생기고 버스 요금도 자동화 되면서 안내양들은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시흥시청이 들어서면서 도로 포장이 되었고 법륭사 앞을 지나지 않고 바로 안산으로 가는 도로가 여러 곳 만들어 졌다. 이제는 버스가 지나갈 때 흙먼지도 일어나지 않는다. 버스마다 에어컨이 있어 창문을 열지 않아도 시원하고, 정류소에서는 곧 도착할 버스 시간까지 알려준다.

모든 것이 좋아진 지금, 큰 디젤 엔진 소리에 털털거리며 흙먼지를 일으키고 다니는 시골 버스가 그리워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shnews  j5900@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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