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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막바지 어느 날이었다. 아침에 눈을 떴다. 세상이 하얗게 바뀌어 있는 것이었다. 12월이 되려면 며칠 더 남았는데… 하늘로부터 새하얀 결정체는 사선으로, 수직으로, 어떤 때는 이리저리 춤을 추면서 춤사위를 하고 있다. 겨울이 온 것이다. 한 해가 저물어 마무리를 한다는 것이다. 가슴이 아련하고, 누구에게 새하얀 눈이 내리고 있음을 전해야만 할 것 같다. 누구와 이 감정을 나눌 것인가. 누구에게 처음으로 이 설레는 마음을 표현해야 할 것인가? 그 날의 감동을 잊을 수가 없다. 매년 보아왔던 것이고 익히 아는 눈이지만 왜 이렇게 가슴은 고동치고, 마음은 울먹이게 되는 것일까? 어린 아이가 다시 되는 것처럼…
몇몇 지인들이 첫 눈에 대한 인사를 보내온다. 나도 정성스레 첫 눈의 감상을 찾기에 골몰하다가 조금은 센티멘탈 무드를 담아 전송버튼을 눌렀다. 며칠 지나서 모임을 통해 안 사실이지만, 그런 센치멘탈 무드에 빠진 사람이 나 뿐만이 아니었다. 첫눈이 오던 날을 충격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은 것이다. 나도 따스한 향이 나는 커피 잔을 놓고 한참이나 추억과 꿈에 빠지는 시간을 가져 보았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한 올에 엮으면서.
자연의 경이를 명석한 두뇌를 가진 인간들은 소박한 장면 하나 하나에 전 우주적, 인류적 차원의 의미를 부여하는 경향이 있다. 의학적 분석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메뷰1)1) 자메뷰(Jamais vu) 평소 익숙했던 것들이 갑자기 생소하게 느껴지는 현상, 이미 경험하거나 잘 알고 있는 상황을 처음 경험하는 것처럼 느끼는 기억의 착각현상.’라는 개념을 적용해 보고 싶어 할 것이다. 익히 알고 있는 눈이지만, 그렇게 새롭고 설렘을 준다는 뜻에서 말이다. 구체적인 적용보다는 그 원리에서 공유될 지평이 큰 것이다.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역사는 반복한다’라는 개념을 적용해 보고 싶어 할 것이다. 철학적 사고에 익숙한 사람들은 니체의 ‘영원회기’라는 개념을 떠올릴 것이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환영과 수수께끼에 대해” 장에서, 영원을 순간이라는 출입문을 통해서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한다. 새삼 어렵기로 소문난 니체의 영원회기나 초인과 같은 개념이 가슴에 부딪쳐 오는 느낌을 가지는 것은 웬 연유일까. 눈이 오는 것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까?
눈이 오는 것은 1년의 한 사이클이 종착점에 들어섰다는 의미인 동시에 새로운 시작을 낳을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 같다. 눈은 망각을 일깨우는 전달자의 역할을 했다고나 할까. 지난 시간에 대한 망각과 새로운 시작에 우리는 떨리고 설레는 것이다. 눈이 오는 것은 한해를 보내는 허무함일 수도 있지만, 그 허무함은 순수하고 아름다운 지복을 잉태하고 있는 것 같다. 긍정적 허무라고 할까. 긍정적 허무는 의지와 본능적 힘을 가지고 다가온다. 눈은 무한한 창조의 에너지와 삶에 대한 긍정적인 변화를 준다. 눈은 짐이 되기도 하며, 욕망이 되기도 하며,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가 되기도 한다. 위대한 철인 니체도 말하지만, 우리 인간은 낙타와 같이 구속의 상태에 있을 수도, 사자와 같이 욕망과 의지의 단계에 있을 수도, 나아가서 어린아이와 같이 초월된 자유로운 영혼을 유지할 수도 있다.
차창 바깥이 눈이 내리고 있다. 내리면서 녹고 쌓이면서 녹고, 또 쌓이면서 반복을 거듭한다. 눈을 바라보는 감회도 반복된다. 나, 너, 우리를 통해 그 감정은 교환되고 해를 이어 대를 이어 퍼져 나간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나오는 개 카레닌은 어제 공놀이를 후회하지 않고, 내일의 꼬리치기를 걱정하지 않는다. 눈이 오니 우리도 그러하리라. 저 눈이 10년 전, 100년 전에도 저렇게 왔다해도, 나는 의식적으로 설렘으로 눈을 맞이할 것이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의식도 개념도 생각도 ‘영원히 회기’하는 것 같다. 과거 현재 미래가 한 점으로 다가와 현재 나의 의식을 지배한다. 새로운 설렘으로 영혼이 자유와과 평온함을 느낀다. 눈이 오고 겨울이 오고, 나의 영혼은 뜨겁고 자유롭다. 어느덧 ‘초인’이 되어 있는 양, 한해가 가고 오는 것을 조금은 떨어져서 즐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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