뜰 앞 오동나무에 가을소리가 날 때

少年易老學難成 (소년이노학난성)

一村光陰不可輕 (일촌광음불가경)

未覺池塘春草夢 (미각지당춘초몽)

皆前梧葉已秋聲 (개전오엽이추성)

소년은 늙기는 쉽고 학문은 이루기 어려운 것이니

짧은 시간이라도 가벼히 여기지 말라

아직 못의 봄풀은 꿈에서 깨나지도 못하였는데

세월은 허탈하게 빨리 흘러

섬돌앞의 오동나무는 벌써 가을소리를 내느니라.

내 방의 한쪽 구석 모퉁이에 먼지가 소복이 쌓인 채 걸려있는 한 구절의 글귀가 있다.

지금부터 약 30여년 전 일이다. 어려서부터 절에서 자란 덕택으로 사숙님(現 불국사 승가대학학장)께서 공부하고 있는 초계(草溪)라는 시골 마을에 가게 될 인연이 되었다.

그곳은 마을 뒤로는 낮으막한 산이 둘러싸여 있고 앞으로 실개천이 흘렀다.

그리고 논에 물을 대기 위해 만들어 놓은 작은 저수지 위에 마른 갈대가 흔들거리는 고즈넉한 마을이었다.

그곳에는 태동서사(泰東書舍)라는 글 읽는 소리가 흘러나오는 서당(書堂)이 있었다.

그 서당(書堂)에서는 연로한 유학자 한 분이 힘겹게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 분을 할아버지라고 불렀던 기억이 있다.

태동서사(泰東書舍)에는 방이 세 칸이 있었는데 할아버지 옆방을 쓰게 되었다.

그 방의 옆으로 대나무 밭이 있었는데, 봄이 되면 죽순(竹筍)이 많이 돋는 곳이었다. 그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죽순을 본 것 같은데 하룻밤 자고 일어 날 때마다 훤칠하게 커가는 죽순을 보고 신기 했다.

할아버지 옆방에 기거하면서 유가에서 초학동(初學童)이 배우는 명심보감(明心寶鑑)을 배우게 되었다.

늘 오전에 두 줄 남짓 할아버지에게 글을 배우고 하루 종일 외워야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 밝아 올 무렵이 되면 할아버지 이부자리를 거두고 우유도 타 드리고 옷을 입혀 드리는 등의 시중을 들고 늘 다니시는 산책길로 모시고 나가서 글을 외워 바치곤 했다.

그러던 중 어느 무덥던 여름날 할아버지에게 은행나무 아래에서 글을 배우고 돌아와서 서재를 정리하다가 여러 겹 접힌 화선지에 쓰인 글 한 장을 찾아내었다.

그리고 그것이 무슨 귀중한 보물이나 되듯이 가져다가 내 방 위에 붙여 놓고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그 글귀를 보시고 떼어 놓으라고 호통 쳤다. 그러나 말을 듣지 않고 고집을 피우며 계속 그대로 놓아두었다.

그리고 며칠이 흘렀다. 저녁 무렵 할아버지는 붓을 들고 명심보감(明心寶鑑) 권학편에 있는 글귀 한편을 써 주시고 내 방에 붙여 놓은 글귀를 떼라고 했다.

결국 붙여 놓은 글귀를 떼어내고 적어주신 “少年易老學難成(소년이노학난성) 이라…皆前梧葉已秋聲(개전오엽이추성) 이니라” 라는 글귀를 붙여 놓게 되었다.

세월이 지나는 동안에 장소도 옮겨지고 표구가 되어서 이제는 법륭사에 내 조그만 처소(處所)에 먼지에 쌓이고 누렇게 탈색된 채 걸려 있다.

늘 앞니를 내보이며 환하게 웃으시던 상투튼 할아버지는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고 그곳의 글소리는 그친지 여러 해 되었다.

거기에서 경전과 유가글을 공부하던 사숙님과 여러 스님들은 강원에서 스님을 가르치기도 하고 또한 각 사찰에서 포교에 앞장서서 노력하기도 한다.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할아버지 서재에서 찾아서 걸어 놓았던 글귀는 할아버지가 열두 폭 병풍에 들어갈 글을 쓰다가 오자(誤字)가 나서 버리려고 뭉쳐 두었던 것이다.

그런 것도 모르고 무지(無知)한 초학동(初學童)인 나는 무슨 글인지도 모른 채 벽에다 붙여 놓았던 것이다.

그 당시 이름난 유학자들도 내 방을 통해서 드나들곤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여간 송구스럽지가 않다.

떼어 놓으라고 하다가 듣지 않는 초학동(初學童)에게 조용히 권학을 바라는 한구절의 글귀를 써 주시며 바꾸어 걸으라고 하고 미소 지으시던 할아버지. 그 글귀 밑에는 다음과 쓰여 있다.

좧“八八老書與承炫” 여든여덟의 노인의 글을 현여에게 주다.좩라고. 八八老人, 권추현선생 한국 유가의 대학자 30여년이 지난 지금에야 비로소 그 뜻을 조금이나마 헤아려 가는지.

주름진 미소는 이 세상에서 사라진지 오래지만 권학(勸學)을 바라는 한 구절의 글귀는 부처님의 뒤를 따르는 지금에도 식지 않고 있다.

또 세월이 흐르고 흘러 뜰 앞 오동나무에 가을 소리가 날 때 나는 어떤 모습으로 세상을 지키고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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